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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 노무현’은 환생했습니다. 생전의 업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의 생이 결정된다는 49재 기간 동안 노무현은 온전한 인간으로 환생했습니다. 어렵게 컸기에 비슷한 이웃을 끌어안을 줄 알았던 ‘어머니’ 같은 존재로 다시금 각인됐습니다.

‘정치인 노무현’도 부활했습니다. 49재 기간 동안 노무현은 올곧은 정치인으로 환생했습니다. 고난의 정치도정을 자신을 버리는 지혜로 이겨냈던 ‘바보 정치인’으로 다시금 평가됐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은 환생하지도, 부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49재 기간 동안 그 누구도 쉬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의 공과를, ‘노무현 정부’의 공과를 함부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슬픔이 물결치는 추모기간이니까 차가운 시각과 건조한 어투는 삼가야 한다고 모두가 여겼습니다.

2.
노무현을 영원히 떠나보내며 확인합니다. 이제는 아닙니다. 슬픔이 자리했던 가슴에 열정을 담고 눈물을 자아냈던 눈망울에 이성을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평가해야 합니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예단은 하지 않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해 실패 또는 성공의 낙인을 미리 찍지 않습니다.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골방에 틀어박혀 개인적으로 ‘대통령 노무현’에 별점을 매기는 행위는 그리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봉하마을에, 서울광장에, 대한문 앞에 모였던 모든 이들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다 함께 ‘대통령 노무현’을 평가해야 ‘노무현의 가치’를 계승하고 혁신하는 힘과 세력이 생깁니다. 

3.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주 절박한 심정으로, 매우 긴요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대통령 노무현’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평가된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의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실패’ ‘무능’ 심지어 ‘사기’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리곤 버렸습니다.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버림’이 ‘충분한 사유’를 동반한 것이라면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없었습니다. ‘충분한 사유’는 몇 개의 조각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전제해 놓고 그 가치에서 일탈한 ‘대통령 노무현’의 사례 몇 개를 얼기설기 엮은 것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전후 사정을 참작할 수 있었습니다. 대선과 총선에서 잇따라 참패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고, 느닷없이 켜진 촛불에 황망해 했습니다. 눈앞의 대사에 밀려 지난 대사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촛불이 스러진 뒤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안 됩니다. 이번에도 경황없이 흘려보내면 안 됩니다. ‘대통령 노무현’의 공과를 인상비평 영역에 남겨둬서는 안 됩니다. 


4.
‘대통령 노무현’의 ‘해원’을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원’엔 이미 주장이 깔려있습니다. ‘억울하다’는 주장, ‘부당하다’는 주장이 깔려있습니다. 나아가 ‘정당하다’는 주장 또한 스며있습니다.

‘해소’를 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억울하다’ ‘정당하다’는 당사자의 주장과 ‘실패’ ‘무능’ ‘사기’라는 제3자의 주장이 엇갈리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입니다.

‘해체’를 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억울하다’는 주장과 ‘실패’라는 평가 사이에서 팽팽하게 조성된 반목과 갈등을 해체하기 위해서입니다. 49재 기간동안 휴전상태에 있었던 이 반목과 갈등이 49재 이후에 격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5.
캐릭터에 의존한 정치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몇몇 ‘이미지 정치인’이 실증합니다. 순간적 인기는 끌지 몰라도 지속적 지지는 받지 못합니다.

‘노무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노무현’의 캐릭터에 압도된 세력 단합과, ‘인간 노무현’의 캐릭터에 의존한 정치 모색은 일장춘몽으로 그치기 십상입니다. 민주당 내에서 ‘친노통합론’이 제기되고, 일부 친노 세력 내에서 ‘독자신당론’이 모색되지만 부질없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끝장을 보지 않는 한 그런 주장과 모색은 모두 공염불에 그치고 맙니다.

6.
국민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여미면서 ‘민주시민’의 도리를 다 하고자 하지만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어느 세력인가를 지지하고 싶지만 대상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민주’를 위해 ‘행동하는 양심’이 돼야 한다는 훈수는 타당하지만 그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승리하는 세력’이 되는 비전을 제시해야 훈수는 비로소 완결됩니다.

그러려면 성찰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대통령 노무현’에 붙어있는 ‘좌파 신자유주의’란 딱지를 걷어내야 합니다. 그 딱지에 스며있는 각인각색의 ‘진보 카테고리’를 하나로 통일시켜야 하고, 그 위에 ‘민주’를 결합시켜야 합니다.

‘인간 노무현’은 보내고 ‘대통령 노무현’은 불러내야 합니다. ‘인간 노무현’의 영면을 기원하면서 ‘대통령 노무현’의 불면상태를 끌어내야 합니다. 오늘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노무현 49’재에 부치는 발제문입니다.

▲사진 출처=프레시안

Posted by '토씨'

“가족들은 엄마를 잃어버리기 이전에 이미 엄마를 거의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엄마의 실종을 계기로 ‘잃다’와 ‘잊다’가 같은 말이었음을 뻐아프게 깨닫는다.” - 정홍수, 「피에타, 그 영원한 귀환」,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1. ‘바보 엄마’ 노무현

노무현 전 대통령 이름 석자 뒤에 붙는 별명은 전투적이다. ‘승부사’라는 닉네임이 그렇고, 그 닉네임에 붙는 ‘냉철’ ‘뚝심’ 등의 수식어가 그렇다. 이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행적에 새겨진 이미지는 남성적이다.

하지만 다르다. 국민과의 접촉면에서 내보인 그의 면모는 사뭇 다르다. 이명박 대통령과 대비해도 전혀 다르다. 대국민 접촉면에서, 이명박 대통령과의 비교 속에서 부각되는 그의 이미지는 (흔히 말하는) 여성적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수다스런’ 사람이었다. 걸핏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열린우리당원과 국민에게 편지를 쓰던 사람, 품격을 팽개치고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던 사람, 때론 ‘내 편’을 지키기 위해 ‘네 편’에게 삿대질을 하던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꾸밈없는’ 사람이었다. 어설픈 통기타 솜씨에 의지해 ‘상록수’를 멋없이 부르던 사람, 종교가 뭐냐는 추기경의 질문에 눈을 내리깔고 ‘나이롱’ 신자임을 고백하던 사람, 가슴이 답답하면 비서에게 담배 한 개비를 얻어 피우던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무던한’ 사람이었다. 지난 행적을 꼬투리 잡아 공격을 가하던 검사에게 뒤끝을 보이지 않은 사람, 상대편이 ‘정신병자’ 운운해도 그냥 웃고만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 탓’이 국민 스포츠가 되었어도 천장 한 번 올려다보며 한숨만 내쉰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런 사람으로 비쳐졌다. 끌어안는 사람, 바로 ‘엄마’였다. 때론 그악스럽게, 때론 호들갑 떨면서, 그러면서도 가족을 챙겨주는, 그래서 그의 존재가 귀찮고 짜증나면서도 당연시됐던 ‘보통 엄마’였고 ‘바보 엄마’였다.

2. ‘모진 아버지’ 이명박

이명박 대통령은 ‘독선적인’ 사람이다. 자수성가 신화를 읊조리면서 자신의 경험과 사고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사람, 그렇게 일방적으로 부여한 정당성을 앞세워 순종을 강요하는 사람.

이명박 대통령은 ‘모진’ 사람이다. 자신의 가치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계율로 다스리는 사람, 반항하는 자식에게 회초리를 드는 사람.

이명박 대통령은 ‘편애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가치에 대한 호오에 따라 애증을 여과없이 내보이는 사람, 직업과 성적에 따라 상벌을 엄연히 구분하는 사람.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사람으로 비친다. 내치는 사람, 바로 ‘아버지’다. 행여 온화한 모습을 보여도 그 뒤로 엄한 시선을 감춘 사람, 그러면서도 권위를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 그는 ‘가부장’이고 ‘모진 아버지’다.

3. ‘모진 아버지’의 핍박과 ‘바보 엄마’의 설움

출발이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모두 같은 신화에 기대어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다. 빈곤한 가정환경, 자수성가한 경력, 정치적으로 아웃사이더였던 이력 등을 무기 삼아 대권을 손에 쥔 사람들이다.

과정도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개혁’의 열망을 안고, 이명박 대통령은 ‘성장’의 기대를 안고 대통령이 됐지만 얼마 못가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대통령 탓’을 ‘고스톱’에 필적할 만한 국민스포츠로 만든 사람들이다.

하지만 다르다. 스타일이 다르고 이미지가 다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끌어안는 스타일이었고, 이명박 대통령은 내치는 스타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바보 엄마’의 이미지로 남았고, 이명박 대통령은 ‘모진 아버지’의 이미지를 굳혀가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민심을 ‘盧추모-反MB’로 흐르게 한 근원이다.

여기에 살아있는 권력의 무리한 수사와 죽은 권력의 인간적 고뇌가 ‘모진 아버지’의 핍박과 ‘바보 엄마’의 설움으로 묘사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을 민심의 저울 위로 올리게 한 것이다.

▶국민여론조사 - 검찰의 ‘노무현 수사’에 대해
‘검찰수사가 전직 대통령을 자살로 몰고 간 잘못은 없는지 그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 60.0% : ‘법절차에 따른 정당한 검찰권 행사였으므로 별도의 책임규명은 불필요하다’ 34.7% - 한국사회여론연구소, 2009년 5월 25일 조사

4.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에 대한 반발

움직이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저주를 퍼부은 사람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통분한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정치인에 대한 정서를 바꾸지 않고 정치적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이들은 상수다.

움직이는 건 부동층이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찍었다가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한 사람들이 수시로 움직이면서 국면을 열고 정국을 좌우한다. 이들의 선택에 따라 국민 여론의 향배가 달라지고 정당 지지도가 춤을 춘다. 이들은 변수다. 캐스팅 보트권을 쥔 결정적 변수다.

이들은 이중적이다. 2008년엔 촛불을 들었고, 2009년엔 향불을 피웠지만 같은 해 벌어진 총선에선 뉴타운에 열광했고 용산참사에 냉담했다. 민주 의제엔 호응했지만 민중 의제엔 불응했다.

이들의 이중성은 하나의 가치에서 나온다. 바로 자유다. 이들은 극심한 경쟁체제에 순응하면서 능력을 키우려 하고 능력이 있다고 자신한다. 그래서 국가는 기회를 제공하고 통제를 제어하면 할 도리를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는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자유로운 이익추구’의 여건만 만들면 된다고 믿는다. 나머지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능력에 맡기면 된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의 경제사회적 통제(교육과 부동산)에 반발했고 이명박 정부의 정치사회적 통제(표현의 자유)를 거부한다.

이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反MB’로 기운 것은 필연이다. ‘747’로 대변되는 이명박 대통령의 성장 이데올로기가 ‘자유로운 이익추구’의 장을 열어줄 것이라던 믿음이 깨진 상태에서 광장 봉쇄로 상징되는 공안 회귀가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장마저 앗아간다고 판단하면서 이들은 불만을 키워왔다. ‘자유로운 이익추구’의 장이 줄어드는 상태에서 ‘이미 잡은 물고기’라고 여겼던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장마저 위축되니까 반발한 것이다. 이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는 상실과 퇴행을 결정적으로 확인하는 계기였다.

5. ‘모진 아버지’의 ‘엄마’ 되기

중도강화·친서민으로 집약되는 이명박 대통령의 ‘근원적 처방’은 ‘엄마’ 되기다. ‘모진 아버지’의 이미지를 털어내고 ‘어진 엄마’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화장이요 이벤트다.

‘스킨십’을 강화하려는 점을 보면 그렇다. 서울 이문동 골목시장을 찾고 원주 마이스터고를 찾아 ‘엄마’의 손길을 연출하려고 한다. 깊이 이해하고 배려하는 ‘엄마’의 눈길을 연출하려고 한다. 그곳에서 또 다시 ‘소싯적’을 자랑해 탈을 냈지만 아무튼 그렇게 시도한다.

‘무차별’을 강조하려는 점을 보면 그렇다. 떢복이집·슈퍼 주인과 담소를 나누고, 보육원의 아이를 들어올리고, 마이스터고 학생들과 ‘짬밥’을 푸는 모습을 통해 차별없는 애정을 강조하려고 한다. 능력·지위를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엄마’의 무차별적 사랑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 전에 노동유연성을 강조하면서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아무튼 그렇게 시도한다.

‘보살핌’을 부각시키려는 점을 보면 그렇다. 사교육 근절을 다짐하고, 청년실업을 근심하는 모습을 통해 자애로운 보살핌을 부각시키려 한다.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엄마’의 무한대 사랑을 부각시키려 한다. 그 과정에서 학원심야교습 금지를 놓고 오락가락하면서 날림정책을 노출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시도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강화·친서민은 청와대가 말하는 것처럼 ‘MB다움’의 회복이 아니다. 그건 ‘노무현스러움’의 모방이다.

6. ‘엄마’ 되기는 성공할까?

성공할 수 없다. 앞 다르고 뒤 다른 언행 때문만이 아니다. 부응할 수 없다. 부동층의 2가지 욕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다.

‘자유로운 이익추구’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올려야 한다. 바닥에서 맴도는 경기를 끌어 올려 ‘자유로운 이익추구’의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기약이 없다.

‘자유로운 의사표현’ 요구는 오히려 억압한다. 미디어법 처리를 강행하려 하고, 사이버 모욕죄 도입을 다그치고, 시국선언 한 전교조를 압수수색한다. 어쩔 수가 없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집토끼’인 보수층이 떠나간다. 그러면 ‘산토끼’를 잡아봤자 별무소용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외길로 달린다. 이게 문제가 된다.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억압하는 행태가 ‘모진 아버지’의 ‘엄마’ 되기를 가로막는다. 회초리 든 손을 뒤로 숨긴 채 다른 한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인식케 한다.

▶국민여론조사 - 이명박 대통령의 서민행보에 대해
‘기대 안돼’ 55% : ‘기대 돼’ 37% - 한국사회여론연구소, 2009년 6월 29일 조사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날은 유동적이다. 민심은 언제 또 바뀔지 모른다. ‘反MB’ 정서가 2007년 대선과 같은 ‘반발성 투표행위’를 낳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다.

개별적이란 게 문제다. ‘盧추모’도 ‘反MB’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개인에 맞춰져 있다는 게 문제다.

‘盧추모’ 정서가 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다. 깜짝 반등은 반짝 효과였을 뿐이다. 민주당의 지지율은 다시 내려간다. 왜일까? 별개로 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민주당을 별개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국민은 잊지 않는다. 2002년 대선 때 자기들이 뽑은 대선 후보를 제치고 정몽준 후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던 구 민주당의 행태를, 참여정부 때 당과 청와대가 분리돼 따로 놀았던 과정을, 참여정부 이후 민주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거리를 뒀던 전력을, 그리고 지금 민주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치를 발전적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목도했고 목도하고 있다.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민주당을 별개로 본다.

‘反MB’ 정서가 표심을 한나라당에서 이탈시킬 것이라고 보는 건 속단이다. 4.29재보선 때처럼 잠시 동안의, 부분적인 이탈은 나타날 수 있지만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이탈을 예단하기는 힘들다.

박근혜 전 대표가 버티고 서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아류가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과 갈등관계를 빚는 동렬의 정치인으로 대기하고 있다. 바로 이 박근혜 요인이 완충역할을 한다. 박근혜 요인이 ‘反MB’ 정서가 한나라당으로 확산되는 걸 차단하고, ‘反MB’의 반사이익이 민주당으로 흐르는 것을 막는다. 여차하면 한나라당이 이명박 대통령을 버림으로써 ‘反MB’ 정서로부터 탈출할 여지를 만든다. 차기 총선과 대선에서 그렇게 작용할 여지를 축적한다.

▶국민여론조사 - 대통령과 정당 지지도

                       4월 18일       5월 25일       6월 22일 
이명박               32.7%           27.4%          25.3%
한나라당            31.4%           21.5%          23.3%
민주당               13.0%           20.8%          20.7%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

8. 그러면…

‘盧추모’는 ‘촛불’을 밝히지 않고, ‘反MB’는 탄핵 카드를 꺼내지 않는다. ‘盧추모’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걸 꺼리고 ‘反MB’가 파국상황을 부르는 걸 경계한다. 그 대신 개인적으로 행동한다. 개인적으로 검은 리본을 달고, 개인적으로 MB비판 댓글을 단다. 민주당에도, 진보정당에도 기대지 않는다.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주목할 현상이다. 민심이 ‘민주주의 위기’를 우려하고 ‘소통’ 요구를 쏟아내면서도 反MB 민주전선 구축에 나서는 민주당과 진보정당을 신뢰하지 않는다.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민심이 말하는 건 이런 것이다.

국민에게 ‘민주’는 채권이다. 돌려받지 못한, 떼일 위기에 놓인 채권이다. 그래서 돌려받으려 한다. 하지만 돌려받지 못한다. 사채업자처럼 조폭을 동원할 게 아니기에 어떤 방도를 강구해야 할지 몰라 발을 구르고 있다. ‘싸움의 기술’을 알려달라고, ‘투쟁의 비전’을 제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채권을 돌려받는다고 해서 이문이 남는 건 아니다. 채권을 돌려받아봤자 본전치기일 뿐이다. 국민은 플러스알파를 원한다. 본전치기에 이문내기를 추가하려고 한다. 약탈하는 것도 싫지만 빼앗기는 것도 싫기에 성장하면서도 분배를 이루는 전략을 제시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전략과 방도를 국민 앞에 내놔야 한다. ‘반대하는 민주’가 아니라 ‘제시하는 민주’, ‘구호로서의 진보’가 아니라 ‘생활상의 진보’를 내놔야 한다.

뛰어넘어야 한다. 민주니 진보니 하는 구분법도, 민주당이니 진보정당이니 하는 구별법도 뛰어넘어야 한다. 민주당에서 ‘진보’의 여지를 끌어내고, 진보정당에서 ‘구체’의 내용을 확보하면서 새로운 세력을 구축해야 한다. 민주당은 대장간에 가 담금질을 받아야 하고, 진보정당은 저잣거리에 나가 세상물정을 배워야 한다.

연대는 고안되는 것도, 기획되는 것도 아니다. 저잣거리에서 국민들에 의해 담금질 되면서 숙성되는 것, 밑에서 끊임없이 부대끼면서 ‘민주’의 실천력을 배가시키고 ‘진보’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것, 이게 바로 연대다.

▶국민여론조사 - ‘2010 지방선거에서 범야권 단일후보가 나온다면 지지할 의향이 있는가’
‘지지하겠다’ 48.1% : ‘지지하지 않겠다’ 36.4% - 한국사회여론연구소, 2009년 6월 22일 조사

※이 글은 노무현 전 대통령 49재를 맞아 ‘광장’ ‘코리아연구원’ 등이 오늘(7일) 오전 9시 30분부터 공동개최하는 ‘노무현의 시대정신과 그 과제’ 심포지엄의 발표문으로, 일부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Posted by '토씨'

“창을 베고 누워 아침을 기다렸다(침과대단·枕戈待旦)”고 했다. “지난 1년간 한시도 마음속의 갑옷을 벗어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자신의 ‘대표 1년’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맞다. 민주당은 창을 베고 누웠고, 갑옷을 벗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창을 휘둘러 본 적도 없고, 상대 장수의 갑옷을 벗긴 적도 없다. 그저 갑옷 입고 창 벤 채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뿐이다.

박한 평가일지 모르겠다. ‘MB악법’ 저지에 혼신의 노력을 다 하는 민주당에게 ‘퍽치기’를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하련다. 노력만큼 성과가 없기에 어쩔 수 없다.

예를 하나 들자. ‘노무현 추모’ 정국이 한창일 때 민주당이 5대 요구조건이란 걸 내놨다. 대통령의 사과와 검찰총장 등의 경질, 특검과 국정조사 실시 등을 내걸며 이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6월 임시국회에 등원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 ‘……’이다. 들어본 적이 없다. 민주당 지도부가 5대 요구조건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걸 들은 기억이 없다. 어느새 없던 일이 돼 버렸다.

그 대신 끌려간다. 비정규직법 문제에 질질 끌려다니며 오락가락한다. 처음엔 해고대란은 없다며 비정규직법 유예 불가를 선언하더니 5인 연석회의에 가서는 ‘6개월 유예’를 제시하고, 다시 비정규직법 원안 고수로 유턴한다.

결과는 참담하다. 비정규직법 5인 연석회의에 참여함으로써 ‘등원 거부’ 전열은 사실상 무너졌고, 정국 화두는 비정규직법으로 옮아가 버렸다. 비정규직법 5인 연석회의에서 ‘6개월 유예’를 제시함으로써 논란의 축은 ‘원안 고수’에서 ‘시행 유예’로 이동해 버렸다. 한나라당의 정국 탈출 전략에 모터를 달아주고, 한나라당이 펼친 그물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 것이다.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이런 오류가 시정될 것 같지 않다.


정세균 대표가 말했다. 대표 임기 2년차의 정책노선으로 정부와의 ‘친서민’ 경쟁을 설정하면서 “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진검승부를 해 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를 ‘이벤트’로 규정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갇힌다. 민주당이 실제로 이런 노선을 걸으면 이명박 대통령의 프레임에 갇힌다. 청와대가 쳐놓은 ‘친서민’ 링에 올라 아웃복싱을 구사하면 잘해야 ‘아류’, 못하면 ‘반대만 일삼는 야당’으로 전락한다. 반대로 이명박 대통령은 앉은 자리에서 '친서민' 이미지를 획득한다. 

지금이 그렇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민주당은 고리를 걸지 못하고, 정국을 주도하지 못한다. 정국 전체를 관통할 큰 화두를 던지지 못하고 매번 개별정책에 갇혀버린다. 청와대와 여당이 설정한 프레임에 갇혀 ‘안티’ 행보만 반복한다. 그렇게 오락가락 하고 일희일비한다.

문제의 근원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규모, 즉 ‘스몰야당’은 구실이 되지 못한다. 근원은 전략과 의지다. ‘민주주의 후퇴’와 ‘민생 파탄’을 관통하는 전선을 치지 못하고, 그 전선에서 지구전을 펼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문제다.

정세균 대표는 노무현 전 대통령 49재가 끝난 후에 친노 세력을 포함한 민주개혁진영의 연대와 통합을 모색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런 상태라면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다. ‘민주주의 후퇴’와 ‘민생 파탄’을 한 데 아우르는 전선 속에서, 싸우면서 구축하는 연대가 아닌 한 그건 이른바 ‘윗대가리들’ 만의 이합집산에 그칠 수밖에 없다.

지금 가장 긴요한 과제는 ‘민주주의 후퇴’와 ‘민생 파탄’ 때문에 길거리에 내몰리고 그 길거리에서마저 끌려가는 민초들을 끌어안는 것이다. 지금 가장 긴급한 과제는 아우성치는 민초들을 이끌 수 있는 비전, 즉 ‘싸움의 기술’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원적인 과제는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후퇴’ 현장과 ‘민생 파탄’ 현장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다시 말해 ‘개별 싸움’을 ‘전체 싸움’에 편입시킬 수 있는 ‘고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짜놓은 링 위에서 청와대가 설정한 프레임에 갇혀 허우적대는 게 아니라 선명하면서도 질기게 싸울 수 있는 자기 판을 짜는 것이다.

▲사진=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5일 대표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민주당

Posted by '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