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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선이 아빠, 우리 집 팔렸어요. 집 산 사람이 이거 허물고 새 건물 올린데요. 이달 말까지는 방 빼줘야 공사 시작한다는데. 이사비용은 드릴 거예요. 걱정 말아요. 그럼 나가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주인집 여자의 목소리였다. 전화를 끊고 방을 둘러보니 그만 살고 나가도 될 만큼 오래 산 표시가 났다. 벽지도 낡았고, 장판도 더러웠다. 살림엔 묵은 때도 끼여 있었다. 22년 된 다세대 주택, 공동화장실을 쓰는 반지하 방.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18만 원을 내고 살았다. 안산에서 이보다 더 싼 방은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또 어디로 가나.

노역잡부 일 하며 딸과 사는 싱글 대디

영선이(가명, 13) 아빠(47)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경기도 안산 외곽지역인 선부동에도 재개발 바람이 불어 전월세가 폭등한 지 오래됐다. 보증금 200만 원 하던 방도 최소 300만 원으로 올려줘야 하고, 월세도 25만 원은 줘야 구할 수 있다.

"아버님, 영선이 아토피가 심해요.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통풍이 잘 되는 곳에서 살아야 해요. 다른 것 좀 줄이더라도 영선이 건강 생각하셔서 집을 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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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 선생님의 말씀에 시름은 더 깊어졌다. 일당 6만 5천 원짜리 노역 잡부의 빤한 수입에 줄일 생활비도 없다. 이제 장마가 시작됐으니 일감은 더 줄어들 판이다. 새벽 4시 30분에 길을 나서면 인력시장 소개로 어느 때는 충남 당진이나 강원도 영월까지 가서 일을 한다. 곤죽이 되도록 일을 하고 나면 몸뚱이는 찢어져 나갈 듯 아프다. 알싸한 소주 한잔이 목구멍을 타고 뱃속에 닿아야 피곤이 싹 풀린다. 술을 끊을 수 없는 이유다.

벌써 12년째 이렇게 살고 있다. 영선이가 갓 돌을 넘길 무렵 보금자리였던 식당을 담보로 더 많은 돈을 벌어보겠다며 일수와 어음 깡을 하던 아내는 결국 사채를 잘못 써 재산을 홀랑 다 말아먹었다. 그 뒤로 부부는 잦은 싸움을 했고, 아내는 '돈을 벌어 빚을 갚겠다'며 집을 나갔다. 지금까지 감감 무소식이다.

"나 산 건 말로 다 못해요. 돌 지나 헤어져 젖동냥도 많이 했습니다. 출근길에 애 안고 학원 원장실에 데려다주고 퇴근할 때 찾아와 밥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남자 홀로 애 키우는 게 쉽지 않았어요. 왜 남한테 맡길 생각을 안 했겠어요. 시설에 보낼 생각도 했었죠.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습디다. 저 녀석 때문에 살지, 그래요."

지난 10일 안산 선부동 무지개 지역아동센터 사무실에서 만난 영선이 아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싱글대디로 산 12년, 고통스러웠지만 보람된 세월이라고 자부했다. 어릴 때 엄마와 헤어진 영선이는 아빠지갑 속에 남겨진 엄마의 증명사진 한 장으로 '엄마려니' 한단다. 가끔 "엄마 안 보고 싶니?"하면 "별로"라고 고개를 가로젓는단다.

영선이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치고 무척 성숙했다. 커다란 키에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려 뒷모습만 보면 "아가씨!" 할 판이다. 덩치는 커도 아이는 아이다. 인터뷰 내내 "아빠, 뭐해?" 말 붙이고, 매달리는 품새를 보면.

영선이는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고 했다. 학교 끝나면 공부방에서 친구들과 놀고 공부하는 생활에 만족한다고 했다. 한 가지 더 원하는 게 있다면, 영어학원 말고, 어릴 때부터 배웠던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싶은 거다. 아빠는 아직 답이 없으시다. 아무래도 돈 때문인 것 같다.

영선이 아빠도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반월공단 동양기공에서 일하다 다쳐 잃은 손가락 때문에 받는 보상금 매월 3만 원, 시에서 나오는 생계보조 18만 원, 간헐적으로 받는 일당 6만 5천 원을 모두 합쳐도 월세 내고 먹고 살기 빠듯한 터에 '피아노'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더 열심히 뛰어서 영선이를 대학까지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공부에 투자하는 것은 아깝다 생각 안 들어도 '피아노'를 배우는 것은 그야말로 나중에 제 돈 벌어 배워도 될 일처럼 생각됐다. 악기를 다루면 자칫 헛바람이 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모두 자기 인생에서 나온 경험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 아내

영선이 아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나이트클럽에서 '6인조 밴드'로 일했다. 베이스기타가 아빠의 주특기다. 음악이 좋아서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했지만 인생이 그렇게 풀릴 줄은 몰랐다. 영선이 아빠의 얘기는 마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한 장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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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금천구 시흥동의 나이트클럽이었는데 매일 밤 손님들 앞에서 음악 하는 게 즐겁지만은 않았아요. 저녁 7시에 일을 시작하면 새벽 4~5시가 돼야 끝났죠. 일이 끝나면 잠을 못 자니까 맥주 마시고. 아가씨들과 어울리고.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비전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 건실하게 일하고 월급 받아 저축하고 결혼도 하고 싶어서 기타를 팔았어요."

서울 구로구 금천동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던 영선이 아빠는 '구로공단'으로 직장을 옮겼다. 첫 직장은 동양기공. 동양기공이 반월공단으로 이사할 때 공단을 따라 영선이 아빠도 안산에 둥지를 틀었다. 영선이 엄마도 그때 만났다.

"93년 크리스마스 이브였어요. 마성호텔 근처 불고깃집에서 회식을 하고 불콰해져 길을 걷는데 앞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가는 여자가 보이는 거예요. 친구들이 저 여자를 꼬셔서 내일 커피숍에 나오게 하면 술 산다, 그래서 취기에 달려가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다음날 정말 그 커피숍에 나와 준 거예요. 사귀다 결혼했지요."

94년 결혼했다. 결혼 뒤엔 목돈을 벌 요량으로 빚을 얻어 식당을 열었다. 97년 영선이 엄마가 집을 나가기 전까지는 어려웠지만 단란한 가정을 꾸려갔다. 감히 행복했다 말할 수 있다. 영선이 엄마가 집을 나간 뒤로 담배와 술이 많이 늘었다. 하룻저녁에 홀로 소주 6병까지 마신 적도 있다. 아빠 술 마시는 것을 영선이가 제일 싫어하지만 괴로울 땐 어쩔 수 없다. 때로는 공부방 선생님들이 알콜중독을 걱정하면서 '단주모임'에 나가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었다.

집 나간 아내 봤다는 말에 정동진으로 달려갔지만

어렵게 사느라 영선이를 데리고 여행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아니다, 딱 한번 있다. 바로 그때였다.

"소문이 들렸어요. 정동진에서 영선이 엄마가 어떤 남자랑 팔짱 끼고 가는 걸 봤다는 소리를 제가 들었어요. 영덕에 산다길래 영선이를 데리고 생애 첫 나들이를 했어요. 기차를 타고, 바닷가를 바라보면서 삶은 계란도 사먹고 사이다도 먹고. 만나면 그 자리에서 실컷 두들겨 패주고, 팍 죽여 버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설사 만난들 무엇하겠냐는 회한과, 영선이에게 도리어 상처만 줄 것 같다는 생각이 가슴 속에서 파도처럼 넘실댔다고 했다. 정동진에서 회를 실컷 먹고 바닷가에서 한참을 뛰어다니다가 영선이가 "아빠 이제 우리 집에 가자" 소리에 도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고 했다.

엄마를 쏙 빼닮은 영선이를 볼 때마다 홀로 지갑 속 사진을 꺼내들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했다. 못난 남편 만나 고생하다 훌쩍 떠나버린 것 같은 자책감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한번 떠난 여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배신감에 가끔 몸서리가 쳐져 정이 뚝뚝 떨어지다가도 문소리가 나면 '영선이 엄마인가' 한단다. 술 마시면 더 생각나고, 보고 싶고, 미치도록 그립다고 했다.       

아직도 영선이 엄마를 사랑하냐고 물었다. 대답이 이렇다.

"걱정되니까…. 만나면 할 말은 없을 것 같아요…. 돌아오면 고맙죠, 뭐."

영선이 엄마가 그리울 때 부르는 노래가 있다. 지금은 손가락을 잃어버렸고, 기타도 처분해 다시 음악을 할 수 없게 됐지만, 홀로 최헌의 '오동잎'을 읊조린다.

"이제 노래도 다 잊어버렸어요. 참 좋아했었는데…."

매일밤 죽을 결심으로 술을 마셨다는 이 싱글데디는 새벽녘 제 이불을 질질 끌고 와 아빠 등에 찰싹 달라붙어 곤히 잠든 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다시 살 것을 결심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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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