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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회는 억압받는 촛불의 편에 서 주세요."

지난 23일 오후 3시 서울 명동성당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청 앞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빚어졌다. 정진석 추기경을 만나겠다는 한 무리의 시민들과 이를 막는 경비들의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늦더위 속에 거센 몸싸움을 벌인 이들은 비지땀을 흘리며 교구청 앞에 돗자리를 깔았다. 그리고 단식을 시작했다. 5일간 펼쳐진 농성의 시작이었다.

50대 회사원과 중년의 아주머니, 일흔이 다 된 할머니 등은 정 추기경을 만나기 전에는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다며 곡기를 끊었다. 5일간 물과 소금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이들은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모두 천주교 신자였던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는 느닷없이 왜 서울대교구 교구청으로 달려가 단식농성을 시작하게 됐을까. 사회단체 활동가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닌 그들. 그저 평범한 '무명씨'일 뿐인데, 생업과 가정을 접고 거리로 나선 이유가 궁금했다.

대개 인터뷰를 사절해서 그 가운데 올해 쉰둘의 박정훈(가명, 중소기업 전무이사)씨를 28일 전화로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올봄 여중고생들로부터 촉발된 촛불집회에 저도 자주 참여한 것 같아요. 유신과 군사정권, 민주정부 시절을 보내면서 한국사회가 많이 변했지만 고질적인 병폐는 여전하지요. 산업현장에는 부정과 부패, 뒷거래가 횡행하거든요. 뒷거래 없이는 견딜 수가 없어요.

개인적 양심으로는 부정한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수치심이 있지만, 그걸 하지 않으면 못 버틴다는 어려움이 있어요. 부정부패가 정말 많이 사라졌지만, 잔존 찌꺼기들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도로 활개 치기 시작했어요. 20년, 30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지요. 그동안 쌓아온 '민주 성장'이 급격하게 퇴보하는 걸 보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촛불을 들었죠."

박씨는 절박하다고 했다. 업계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를 일일이 모두 다 전달할 수는 없지만 대개는 직감할 것이라고 했다. 뒷돈 없이는 살 수 없는 부조리의 시대가 다시 온다면 그 얼마나 암울하겠냐고 그는 개탄했다.

물론, 본인은 이미 쉰 살이 넘어 살아야 할 날들보다 산 날들이 훨씬 많지만, 당장의 문제에 눈감고 있자니 후대의 삶이 걱정된다고 했다. 부정과 부조리에 눈감고 편승하는 것은 양심상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도 했단다. 그래서 촛불을 들고 봄 지나 여름 되니 어느덧 KBS와 MBC 앞을 전전하며 '공영방송 사수' '방송 민영화 저지'까지 외치게 됐다고 했다.

촛불은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로 촉발됐지만 결국 이명박 정부의 정책은 현안마다 촛불을 들며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고 일갈했다. 문제는, 한나라당이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며 이를 갈고 정권교체를 준비해온 것에 비해 진보개혁진영은 '허송세월'을 한듯 하여 답답하다고 질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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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재의 위정자가 남부끄러운 줄 모르고 일을 추진하는 게 가장 큰 문제지요. 하지만 진보개혁세력들이 얼마나 상황을 간과했는지, 반대로 수구세력은 얼마나 이를 갈고 준비해왔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조중동의 왜곡보도에 따라 검찰과 경찰이 무리하게 네티즌을 탄압하고, 촛불을 모조리 잡아들이려 하고, 무고한 시민을 향해 색소탄을 쏘고, 국민을 돼지몰이 하는 등 민주국가라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 터지는 데도 소위 민주세력이라는 사람들이 무력하게 판판히 깨지며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울화가 치민다고 했다. 그야말로 한국은 '조선일보의 나라'인가 속으로 곱씹고 또 곱씹게 된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가 방송을 장악하면 지지 세력을 복원하고 진보개혁세력을 무력화 할 게 뻔해 보이는 상황에서, 진보 쪽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힘도 없이, 관망하는 아주 슬픈 상황이 된 게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서울 여의도 KBS 앞에서 같은 마음으로 촛불을 들고 있던 중년의 '등촌동 아주머니'와 '할머니' 등과 함께 명동성당으로 달려가게 됐다고 했다. 촛불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벌인 '작전'이었다고 했다. 같은 천주교 신자로서 교회에 읍소를 해서 종교인들이 나서면 조금 더 달라진 상황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고대했다고 했다. 이것도 이름 없는 '무명씨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게다.

천주교 최고 지도자의 적극적인 힘을 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의 씨앗은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지난 27일 오후 5일간 외면해오던 그들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정 추기경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께서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국민과 소통하는 것"이라며 "국민들의 다양한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줄 것을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 "나 자신도 부족하지만 국민의 뜻과 함께 하고 행동하는데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박씨는 "추기경님께서 내용상 표 나게 말씀하신 건 아니었지만 촛불의 시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며 "교회 전체가 당장 나서지는 않는다 해도 어떤 상황이 만들어지면 촛불의 소리를 외면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당장 큰 변화를 만들 수는 없어도 '무명씨'들의 이런 노력이 쌓인다면 한국사회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냐고 기대했다. 87년 6월항쟁과 달리 2008년 촛불운동은 주도세력이 없는 자각된 시민 일반의 불복종운동이라는 점에 주목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87년 당시에는 그야말로 깨어 있는 대학생들이 전면에 나서 시국의 문제점을 부각했지요. 지금은 일사분란 한 조직체계도 없고 긴밀한 네트워크도 없어요. 촛불시민은 개인들이기 때문에 정권이 작정하고 구속하고 탄압하면 숨을 수밖에 없죠. 전사 같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다 생업이 있고.

그래서 정부도 쉽게 보고 조중동 광고중단 운동한 일반 시민들 막 잡아가는 것 같아요. 아무렇게나 무력을 휘둘러도 일개 시민이 뭘 대응하겠냐는 식인 거죠. 네티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거고. 촛불시민은 구심점이 없으니까 쉽게 스러질 수 있어요. 저도 그렇고.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데. 촛불이 그냥 스러지기에는 대한민국의 앞날이 너무 걱정되는데. 뭐라도 해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쉰이 넘은 나이라면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때도 묻히고 살 법하다. 더군다나 중소기업 중역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박씨는 그냥 이렇게 촛불이 스러져가는 것을 바라만 보기가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새록새록 든단다. 사람들을 모아 명동성당으로 달려간 것도 다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그의 이런 열정은 한국사회의 중요한 자산 아닐까. 박씨야말로 시인 김수영이 노래한 '풀'처럼 가장 먼저 눕고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촛불민초'가 아닌가 싶다.

무명씨도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절박감을 갖고 있는데, 진보개혁 정치인들은 어떤 절박감을 갖고 있을까. 오늘 아침 조간에 실린 민주당 당직자들의 줄넘기 사진을 보고 문득 든 생각이다.

* 사진은 아고라에서 발췌했습니다.

Posted by 비회원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말하는 걸 보고 대통령 선거에서 찍지 않았죠. 그렇다고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진 않았어요.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기대를 많이 한 게 사실이잖아요.”

비록 ‘이명박 후보’를 찍지 않았지만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 복원이나 ‘버스개혁’에는 지지를 보냈다는 현선행 보살(본명 조현숙. 59세, 경기 분당). 26일 서울 강남의 봉은사에서 만난 그는 ‘기도만 하지 말고 시청 앞으로 모이자’고 주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헌법파괴·종교차별 이명박 정부 규탄 범불교도대회’에 참석하자고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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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손에 이끌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절을 찾았어요. 불교를 통해 세상을 봤고요. 그런데 ‘이러다 말겠지’ 한 불교탄압이 불교계에선 대통령이나 마찬가지인 총무원장까지 경찰이 수색하는 지경이 됐으니…. 이러다가 4년 반 뒤에 불자들이 설자리가 없겠다는 위기감이 들어요. 유야무야 넘어가면 안돼요. 불자들이 목소리를 분명히 내야 할 때라고 봐요.”

그는 미리 준비해 온 메모를 보면서 조근조근 이야기를 풀어갔다. 아마도 전날 인터뷰 약속을 잡은 뒤부터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을 그 메모에는 그동안 종교편향으로 지목된 사건들과 자신의 생각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오죽했으면 불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의지를 모았겠습니까. (불교탄압 사례를 열거한 뒤) 이건 1600년 불교역사, 아니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이 사람들이 다시 쓰려고 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공직자들이 나서서 훼손하고 있잖아요. 전면적인 불교 압박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정부라면 불자들도 생각을 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경찰청장은 파면은 아니더라도 좌천은 해야 한다고 봐요.”

범불교도대회가 종교 이기주의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지 않겠냐는 질문을 던져봤다. 단박에 ‘자업자득’이란 답이 돌아온다.

“이전에 이런 적이 어디 있었나요? 현재의 일부 종교 지도자들과 공직자들이 범불교도대회를 있게 한 겁니다.”

정부의 ‘불교계 달래기’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국무총리까지 나서 재발방지를 약속했지만 공염불이었다는 것이다.

“처음 일이 벌어졌을 때 즉각 사과하고 징계를 했으면 모를까 그도 아니고, 말로는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해놓고 계속 이어지고 있잖아요. 불자들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불자들의 요구는 큰 게 아니에요. 맘 편히 종교생활을 하도록 소위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보장해주길 바라는 것뿐입니다. 송파구청 알바생 논란이나 조계사 불전함에 순복음교회 봉투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치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말이에요.”

현선행 보살을 만난 봉은사 곳곳에선 정부 비판 플래카드와 격문, 탄압사례 사진전으로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우려가 들었다. 이러다가 종교간 갈등이 격화되는 건 아닌가 하는…. 하지만 현선행 보살은 이런 우려를 간단히 내쳤다. 종교간 갈등을 막는 해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구가하되 금도를 넘지 않는, 그래서 공존을 이루는 그런 자유 말이다.

“얼마 전 인드라망 공동체 도법 스님이 생명평화 탁발순례 길에 성남에 왔길래 찾아갔더니 교회에서 숙식을 제공하더라구요. 도법 스님은 ‘이웃 종교는 우리 종교의 의지처이고, 우리 종교는 이웃 종교에 의지해 살아가는 종교공동체’란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는 불법 테두리 안에서 아이들 잘 크고 건강하게 살길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사진 제공=시민사회신문

Posted by '토씨'


‘구직 단념자.’ 취업 의사와 능력은 있으나 ‘노동시장적 사유’로 일자리를 구하지 않는 사람 중 1년 내 구직 경험이 있었던 사람을 뜻한다. 구직 활동에 나섰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뒤 구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실망 실업자’를 뜻하기도 한다.

정부는 이렇게 구분한다. 그래서 최근 4주간 적극적으로 구직 활동을 한 사람 중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을 의미하는 ‘실업자’를 경제활동 인구에 포함시키는 반면에 구직 단념자는 경제활동인구에도 포함시키지 않는다.

정부의 이런 분류법을 당사자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니, 누구 맘대로 구직을 단념했다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물론 기분 안 좋죠. ‘백수’는 그래도 노력하는 존재라는 함의를 담고 있지 않나요? 왜 정부가 구제할 수도 없으면서 마음대로 규정하려 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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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경기 성남 중원도서관에서 만난 ‘전국백수연대’ 회원 아이디 ‘마페’(30)는 분통부터 터트렸다.

“누군들 취업을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지난 2002년 전문대를 졸업하고 그가 선택한 것은 직업전문학교였다. 취업 장벽을 쉽게 통과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직업전문학교 졸업 이후 들어간 직장은 전공인 컴퓨터와 맞지 않았다. 다시 공무원 시험에 도전했다. 그나마도 여의치 않았다. 몇 군데 직장을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성남 인근 공단의 공장에서 캐드 일을 하게 됐다. 그 일 역시 사장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경찰서를 오고가는 통에 금세 접고 말았다. 그 뒤로 지난 6개월간 ‘백수’로 지내며 힘을 잃고 있다. 정부의 표현대로라면 ‘마페’ 또한 구직 단념자의 대열에 서 있는 셈이다.

“마지막 직장에서 나올 때는 ‘왜 이렇게 꼬일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력서 내는 것도 지쳐서 여기저기 친구들한테 구직 부탁도 해보지만… 쉽지 않네요.”

스스로 생각하는 결점이 있긴 하다. 대학 시절 발병한 간염으로 군 면제를 받았다. 면접을 볼 때마다 묻는 병력에 그는 우물쭈물해야 했고, 그것이 취업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단다.

“일종의 두려움이죠. 하지만 더 큰 두려움은 무기력입니다.”

사실상 무직 상태였던 지난 6년간 그의 공포는 나태와 무기력이었다. ‘네 나이가 벌써 서른’ 이라며 채근하는 부모님의 성화마저 뚝 끊긴 것 역시 공포다.

오랜 백수 생활을 보내며 ‘그래도 기상 시간은 빨라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 오전 7시쯤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도서관에 출근해 취업정보 검색하고, 소일거리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리는 소설도 쓰다가 집에 돌아와선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 게 평균적인 하루 일상이다.

“용돈 조달요? 솔직히 쓸 데가 없어요.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취업을 해서 만날 일도 드물고 만나도 자기네 회사 이야기만 늘어놓으니 부담도 되고…. 생활반경이 점점 좁아지는 거죠. 도서관이 없었다면 어쩔 뻔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국백수연대’ 커뮤니티에서 활동한 이유도 무기력 타파를 위해서였다. 홍대 인근에서 오프라인 모임을 갖기도 했고, 동료 ‘백수’들과 사회적 기업을 만들자는 모색도 해봤다. 안타깝게도 흐지부지 됐지만.

“회원은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아는데 아무래도 백수라는 위치 때문인지 오프라인에서 모이는 수는 많지 않더라구요. 조금 아쉽습니다.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끼리 서로 힘을 얻으면 좋을 텐데, 지역별로 모여 백수 탈출 정보도 주고받고 말이에요.”

그가 주변에서 무수히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는 예상대로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이다.

“인근 상대원 공단도 있는데 거기서 일해보라는 말 많이 듣죠.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마지막 일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겪어보니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더라구요.”

다른 측면에서 ‘젊은 사람들이 사회에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도 그를 ‘발끈’하게 하는 것이다.

“친구 만나는 것도 소심해지는 백수들이 사회 이슈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있겠어요? 그래놓고 촛불집회엔 실업자들만 나온다는 말이나 하고, 더 열 받죠. 백수들끼리 마음 맞춰 모이는 것도 힘든데 집회엘 어떻게 나가요. 저만 해도 ‘아프리카’에서 실시간 중계나 봤을 뿐이에요.”

세상 이목이 집중된 올림픽도 관심 밖이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1등만을 주목하는 올림픽 열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백수’에게는 힘든 시절이다.

“딱 봐도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대다수인 이 도서관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해봤죠. 어디 한 건물에 백수들만 모여 일도 시키면서 더 나은 취업을 위한 자기계발을 지원하면 어떨까 하는…. 정부 지원이요? 에이, 정부는 그냥 조용히 있어주기만 해도 고맙죠. 종교단체나 사회단체 같은데서 해 볼 순 없을까요?”

‘마페’는 어쩔 수 없이 공상이 늘었다며 웃는다. 몸 놀릴 생각으로 집 뒷마당에 옥수수를 심어놓고는 ‘이걸 바이오 디젤로 만들어 팔아 볼까’ 궁리 하면서 또 혼자 웃는다.

결코 길게 실업상태를 유지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 움츠러든다. 실업이 일상화되고 있는 시대에 ‘직장 못 구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라고 채근하는 사람들 앞에서 뭐라 한마디 하고 싶지만 마음뿐이다. 건설경기 부양으로 일자리를 만들려는 정부 계획을 보면 시대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아 답답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전국에 백수들한테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라고 말하고 싶네요. 아니면 ‘백수봉사대’라도 만들면 어떨까요? 봉사만큼 활력을 주는 게 없잖아요. 취업 후 하고 싶은 일이요? 저는 우선 남들 다 한다는 CMA 통장부터 만들려구요.”

※‘마페’가 발끈한 ‘구직 단념자’는 계속 늘고 있다. 지난 19일 통계청은 ‘7월 고용동향’을 통해 지난달 비경제활동인구 가운데 구직 단념자는 12만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과 비교해 1만 6100명(15.5%)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자료사진 출처=오마이뉴스

Posted by '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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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충북 옥천의 한 화학섬유공장에서 불이 났다. 당시 옥천 119안전센터에 접수된 화재지령을 받고 출동한 소방관은 4명. 이들은 모두 화재진압에 필요한 장비를 갖추고 현장으로 떠났다.

모든 사고현장에서는 인명구조가 최우선이라고 훈련받은 소방관들은 일단 진입 가능한 현장이면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간다. 혹여 살아 있을지 모르는 생명을 끝까지 구해내는 것이 소방관들의 첫 번째 임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이때 개인의 안위 따위는 생각할 틈이 없다. 

화재진압을 시작한 지 10여분이 지났을까. 물을 타고 기름이 올라왔다. 삽시간에 불은 소방관들의 온몸으로 옮겨 붙었다. 휘발성이 강한 란도 오일. 대개 자동차 용도로 쓰이는 이 기름이 섬유공장에 있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던 거다. 예측불가의 상황이 터진 셈이다.

이 사고현장에서 다행히 목숨은 구했지만 얼굴에 2도 화상을 입은 소방관 임은재(41)씨. 그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고 했다. 서울 대조동 나이트클럽 화재현장에서 희생된 3명의 은평소방서 소방관 영결식이 눈물 속에서 진행되던 지난 22일 오후, 그와 전화인터뷰를 했다.

"칠흑 같이 어둡고 내부가 어떤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진입해야 하니까 솔직히 불안하지요. (웃음) 그래도 그 안에 사람이 있나, 없나 꼭 확인해야죠. 그런데, 아마 불을 보면 누구든 무아지경에 빠질 거예요. 다 끝나고 나면, 나중에야 위험했다는 생각이 들지만요."

불 속에 들어가면 모든 소방관들은 흩어져 진압을 시작한단다. 50분짜리 공기를 주입하고 화마와 싸우게 되는데 대개 30분을 넘기지 못한다고. 그만큼 불 속에서는 산소가 많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50분이 다가오면 자체 경고음이 나오지만 아비규환 속에서 일단 빠져 나와야 하는 발걸음은 가볍지만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구조현장에서 산소가 떨어지면 소방관도 죽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정확한 사고원인이 파악돼야 알 수 있겠지만 대조동 나이트클럽 사고현장도 예측불가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대개 양식 철골구조, 조립식 지붕은 열에 의해 녹지 일시적으로 붕괴하지 않거든요. 그렇지만 나이트클럽엔 커다란 조명이 천정에 붙어 있잖아요. 아마도 그 무거운 조명과 지붕이 무너져 내린 게 아닌가... 이 또한 예측불허의 상황이었겠지요."

임 소방관은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인력부족, 처우개선, 예산배정, 소방방재청의 독립관청화 등등 소방관이 사고로 목숨을 잃을 때마다 언론은 시끄럽게 대안을 말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사람 죽은 다음에 무슨 소용이 있냐고 개탄했다. 죽지 않고, 최대한 희생을 줄이면서 구조할 방법적 대안은 없겠냐고 한탄하기도 했다.

임 소방관은 벌써 13년째 나 아니면 내 동료가 언제든 화마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남 같지 않은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며 웃었다. 또 다른 11년차 소방관의 생각도 비슷했다.

"매뉴얼대로? 현장에선 잘 안 돼죠"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다고 밝힌 그는 소방관이 왜 자꾸 죽어나는지 그 얘기를 쓰라고 했다. 현장 안전관리자가 각 소방서마다 정해져 있지만 책임자는 현장에 안 나온다고 했다. 소방관의 출동과 안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담당자를 정해서 대원들의 희생 없이 활동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난사고와 산악사고는 체력과 관계가 있어요. 체력소모가 많거든요. 그렇지만 화재사고는 안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대조동 나이트클럽 화재사건도 지붕 붕괴위험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죠.

붕괴위험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무조건 들어가지 않고 일단 진입을 차단시킨 상태에서 방법을 찾았을 거예요. 붕괴위험이 있는 곳인지 아닌지 판단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원들이 무작정 들어갔다가 참변을 당했다는 게 문제 같아요. 소방관 안전에 대한 종합판단 없이 '무대포 식' 진압작전이 반복되는 게 문제점이라고 봐요."

불길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최소한 건물구조 상의 위험요인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는데, 실제 잘 안 된다고 했다. 건물 안에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인명구조 활동을 벌이기 때문에 일단 불을 보면 막무가내로 진입하게 된다는 거다. 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안전수칙도 있고, 화재매뉴얼도 있고, 다 있어요. 그렇지만 현장에서는 잘 안 지켜진다는 게 문제지요. 화재현장은 살아 있는 생물 같아서 언제든 변화할 수 있어요. 따라서 한번 짜여진 매뉴얼을 매번 똑같이 적용할 수 없지요. 또 현장에서는 매뉴얼대로 잘 안 돼요. 사실 소방관의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건물 안에 사람이 있다는 전제 아래 인명구조 활동을 벌였는데, 정작 그 안에 사람은 없고 건물구조와 상태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해 소방관만 희생됐다면 그 작전은 실패한 작전 아니냐고 되물었다. 문제는 이 같은 일이 매년 되풀이 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최근 6년간 40명의 소방관이 순직했다. 2003년부터 매년 7명, 8명, 6명, 7명씩 죽어나갔다. 이 중 15명은 화재진압 당시 사고로 순직했다. 부상자 수도 꾸준히 늘고 있다. 소방방재청은 지난 2003년 367명이 공무상 부상을 당했다고 발표했다. 결국 매년 7~8명의 소방관들이 목숨을 잃는 격이다. 이 고귀한 생명들이 '실패한 작전'으로 희생된 것이라면 누가 그들의 죽음에 책임을 질 것인가. 억만금을 준다 해도 목숨보다 소중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진= 20일 새벽 서울 은평구 대조동의 한 나이트 클럽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다 순직한 소방관 3명의 빈소가 마련된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한 유가족이 오열하고 있다.
ⓒ 연합뉴스

Posted by 비회원


“문국현 대표 본인만 당 정체성 훼손이 아니라고 보는 게 문제다.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원내 활동을 위한 방편이라고 하지만 국민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 700~800여명의 당원들이 최근 순식간에 당을 떠났는가? 문 대표가 답을 해야 한다. 문 대표와 의견이 다르면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는 게 현재의 창조한국당이다. 당 쇄신? 문 대표가 당무를 지배하지 않는 것이다.”

창조한국당과 자유선진당의 이른바 ‘창자연대’에 반발해 지난 7일부터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국민은행 들머리에서 단식농성을 벌이는 김서진 창조한국당 최고위원을 12일 만났다.

그의 앞에는 ‘그만두고 싶을 때, 딱 한걸음만 더!’라는 부제가 붙은 ‘그래도 계속 가라’는 제목의 책이 놓여있었다. 대선 직후부터 내홍이 끊이지 않았던 창조한국당을 바라보는 그의 심경이 반영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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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최고위원은 단식에 앞서 기자회견을 통해 “‘사람중심 희망정치’라는 새로운 정치실험을 주장했던 문국현 대표는 부패하고 무능한 구태정치를 답습하는 작금의 행태에 대해 당원과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해야 하며, 이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적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문 대표 개인이 자유선진당에 합류하는 것이 정치적 도리”라고 강하게 성토했다.

‘폭거’, ‘희대의 꼼수’, ‘정치적 코미디.’ 기자회견문에 담긴 표현이다. 그러면서 그는 ‘문국현 대표, 당신이 떠나라’고 일갈했다.

“원내교섭단체 구성의 전제라는 ‘쓰리 포인트’(쇠고기, 대운하, 중소기업) 외에 다른 것은 상관없다는 말인가. 더구나 쇠고기 청문회를 둘러싼 자유선진당의 태도는 이마저 훼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공기업 재벌 분양정책’(그는 공기업 민영화를 이렇게 불렀다) 등 창조한국당의 지향과 벗어난 기조를 자유선진당이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정책정당의 핵심은 자신의 가치와 노선을 국민으로부터 평가 받는 것인데 이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김 최고위원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원내교섭단체 구성은 이미 기정사실이 됐다. 되돌릴 길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김 최고위원은 ‘해체’를 주장한다.

“‘창자연대’ 해체를 위한 당내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단순히 원내교섭단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식투쟁은 그동안 계속 흔들려온 당 정체성 확립 요구라는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언제까지 단식을 계속할지는 뜻을 같이하는 당원 동지들과 논의를 거쳐야 하겠지만 지금은 기한 없이 진행할 생각이다.”

당 내외에서는 김 최고위원의 단식투쟁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있다. 최고위원의 위치를 망각한 당 대표 흔들기, 또는 민주당과의 합당을 바라는 탈당파그룹의 당 훔치기라는 비난이 그것이다.

“나는 ‘사람중심 희망정치’라는 창조한국당의 기조와 이를 위해 처절하게 일해 온 당원들을 잊을 수가 없다. 부분 정책연대는 자유선진당이든 민주노동당이든 필요하면 가능하다. 하지만 원내교섭단체 구성은 다른 문제다. 정책정당을 표방한 이상 편법과 변칙이 아닌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민주당과의 합당? 명확히 지역정당인 민주당과 어떻게 한다는 것 역시 정도가 아니지 않는가.”

쇄신 방향을 묻자 그는 자괴감을 토로하며 말을 이어갔다.

“당 대표의 절대적 권위에 의한 사당화가 근본적 문제다. 지난달 12일 전당대회를 통해 집단지도체제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실제로 당을 운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당 대표와 이를 둘러싼 분위기가 개선되지 않는 한 문제는 계속된다.

이번 경우에도 나중에 중앙위 회의를 통해 추인은 됐지만 기습적인 ‘창자연대’ 직전까지 어떤 타협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보고를 요청해도 구두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다양한 의견에 대한 논의과정과 합의가 정당의 기본적 메커니즘임에도 창당 이후 당헌 당규에 의거한 절차적 민주주의가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다.”

결국 핵심은 문국현 대표다. 김 최고위원이 단식 기자회견문에 적시한 것처럼 문 대표가 당을 떠나는 것만이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고 창조한국당이 사는 길이 될 수 있을까?

“국민들은 진정성이 담긴 정치에 목말라 하고 있다.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볼 것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다소 강한 표현을 썼다. 지금도 문 대표가 생각을 바꾸길 희망한다. 하지만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킨다면 떠나야 하는 게 맞다. 당의 정체성에 반한다면 나를 비롯해 누구나 마찬가지다.”

59년 광주 태생인 김서진 창조한국당 최고위원은 경실련 기획실장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서울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거쳐 지난 총선에서 창조한국당 후보로 강북구 갑에 출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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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살이 쪘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대우를 받아본 일이 있으신지. '무명씨 이야기' 행운의 세븐, 일곱 번째 주인공은 올해 쉰둘의 노총각 김정봉 씨다. 몸무게 152kg, 허리둘레 52인치, 키 177.5cm. 수치만 들어도 대충 상상할 수 있다, 그의 상황이 현재 어떠한지를.

최근 <조선일보>는 동국대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오상우 교수팀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저소득층의 비만문제'를 다룬 바 있다. 전국 1만2천여 가구의 국민건강영양조사(2005) 결과 월 100만원 이하 가구소득 여성의 비만율은 35.4%. 이 계층의 여성 3명 가운데 1명은 비만이라는 연구결과다.  

2005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월 100만원 이하 가구소득 가정의 소아 비만율 또한 11.2%로 다른 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적 현상일까. 그건 아니다. 미국 LA 시의회는 지난 7월 "앞으로 1년간 남부 LA지역에서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푸드 음식점의 개업을 완전 금지하는 조례"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칼로리는 높고 영양가는 낮아 '비만의 원인'이 됐던 패스트푸드의 섭취를 최대한 막겠다는 게 시의원들의 의지였다.

실제 이 지역에 사는 저소득층의 비만과 패스트푸드에 상당한 연관이 있다고 보고 이 같은 조치를 내렸다고 미국언론들은 보도한 바 있다. 외신에 따르면 뉴욕시도 모든 식당메뉴에 음식 칼로리 의무표시제를 도입하는 등 그야말로 미국은 '비만과의 전쟁' 중이다.

이웃나라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정부는 지난 4월부터 40~74세 근로자 및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연 1회 허리둘레를 측정하고, 기준치(남자 33.5인치, 여자 35.4인치)를 넘는 이들은 다이어트 프로그램의 관리를 받게 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다. 6개월 후에도 허리둘레가 줄지 않은 사람은 재교육을 받아야 하고 해당 기업에게는 직원의 허리둘레 관리 책임을 물어 벌과금까지 물리고 있다.

세계 비만인구 3억명...'슈퍼 사이즈 미'는 더 이상 남의 얘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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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의 비만인구는 모두 3억명으로 추정된다. 과거에는 세계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가 굶주림과 영양부족이었다면 21세기는 패스트푸드를 필두로 한 과체중 문제가 건강에 적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비만 인구도 해마다 40만명 이상 늘어나, 비만 전단계인 체질량지수(BMI) 25 이상인 과체중 성인인구는 이미 1000만명을 넘어섰다. '슈퍼 사이즈 미'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오늘 만나 얘기를 들어볼 김정봉 씨도 같은 사연을 안고 있다.

얼굴은 나이에 비해 동안이었다. 앞머리까지 뒤로 넘겨 고무줄로 묶어 올린 머리카락은 엷은 갈색이었다. 지난 13일,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기자와 만난 김정봉 씨는 살면서 겪었던 '슬픈 비만일화'들을 툭툭 털어놓았다.

그는 서울 후암동이 고향이다. 어릴 땐 몸이 너무 약해서 어른들이 '저거 커서 사람 구실 하겠나' 소리를 하는 걸 많이 듣고 자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는 비만 오면 학교에 결석했다. 고등학교 때는 약간 통통한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인 스물, 스물하나 무렵 그는 급격히 살이 쪘다. 하루 6끼씩 밥을 먹기도 했다.

스물하나 군 입대를 앞둔 시점에 그는 92kg이었다. 스물 둘엔 94kg, 스물 셋엔 98kg. 솔직히 군에 안 가도 될 줄 알았다. 그러나 3급을종 '방위' 판정을 받았다. 김씨에 따르면, 당시 후암동엔 같은 처지의 또래들이 무려 35명이나 됐단다.

어른들은 "방위라도 군에 다녀와야 남자가 된다"고 했지만, 솔직히 김씨는 "부모님께서 돈을 좀 주고라도 군대에서 빼주지"했단다. 근 100kg에 육박한 상태로 훈련소에 입소한 그는 몸에 맞는 군복이 없어 고생깨나 했단다. 사복 입고 훈련소를 돌아다닐 수 없어 내무반에서 보름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특별한 것 없이 있으니 훈련소에서 '나가 옷 맞춰 입고오라'고 하더군요. 이태원에 가서 미군 군복 늘려 입고 와서 훈련받았지요."

"살을 빼주마? 그건 선임병들의 놀림과 괴롭힘이었다"

선임병들의 놀림과 괴롭힘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살을 빼주마'고 들러붙은 선임병들은 날마다 모래주머니를 이고 선착순 집합을 시켰다. 김씨만 시킨다면야 그나마 나았겠지만 늘 단체기합이었다. 함께 입소한 훈련병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고된 훈련은 날마다 계속됐다.

하루는 물을 입 안 가득 머금고 있다 대대장 차가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그 앞에서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대대장이 "애 살 빼주랬지, 애 죽이라고 했느냐"고 야단을 쳐 그 뒤로 '말도 안 되는 살빼기 선착순' 훈련은 없어졌다고 했다.

방위에서 소집 해제된 김씨는 공업고등학교 때 배운 용접기술로 취직을 했다. 큰아버지 회사인 태진철강 등을 다녔다. 젊은 나이에는 해외경험도 쌓아야 한다는 주변의 권고로 80년대 한창 '중동 붐'이 일 때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기도 했었다.

"시험에선 붙는데 면접에서 자꾸 떨어져요. 이유가 뭔지 너무 궁금했지요. 83년 봄 극동건설에 시험 봤었는데 면접에서 또 안 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따졌죠. 답은 역시 비만이 문제였어요. 건강 때문이라고 했지만 뜨거운 사막에서 이 덩치로 견딜 수 있겠냐, 혹시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 해서 자꾸 낙마시켰던 거예요."

그는 혈압도 정상, 당뇨도 없다, 등등의 이유를 걸고 취업에 하자 없음을 계속 입증했다. 결국 그는 83년 봄부터 1년간 사막에서 일했다. 84년 아버지의 부음 소식만 없었다면 더 일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도 그의 비만은 화젯거리였다.

"3개월도 못 버틴다, 6개월도 못 버틴다, 등등 저를 두고 사원들끼리 내기를 했더군요. 더운 사막에서 그 덩치로 어떻게 견디겠냐 이거죠. 결국 1년은 넘길 것이라는 현장소장이 내기에서 이겨 돈을 다 땄다는 얘기까지 들었어요. 적지 않은 돈이 내기에 걸렸던 걸로 아는데, 나중에 그 얘기를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죠."

그 뒤로는 취직이 잘 안 됐다. 또 비만이 이유였다. 하는 수 없이 일용직 용접 일을 전전했다. 10년간 간헐적으로 일용직으로 일했더니 살은 더 쪘다. 생활비를 위한 카드빚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5천만원의 빚에 허덕이던 그는 2006년 11월 파산선고 끝에 면책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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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백수, 카드빚 5천만원, 그리고 비만

2002년엔 이런 일도 있었다.

"살 빼는 게 소원이어서 그런 일도 생긴 것 같아요. 우연히 서울지하철 3호선 교대역을 지나는데 한 사람이 절 너무 반가워하는 거예요. 알고보니 다단계 다이어트식품회사 직원이었지요. 먹으면 살이 빠진다길래 3개월간 충북 옥천에 있는 그 회사 수련원에 기거하면서 30kg을 뺀 일도 있었어요. 친구가 와보고는 '너 죽는다'며 절 끌고 갔죠."

살은 빠졌지만 건강상태는 만산창이였다. 병원에서는 무리한 다이어트로 모든 면역체계가 깨졌다고 했다. 그는 친구가 사온 라면 한 박스를 먹고 급기야 130kg의 몸무게를 만들었다.

그 뒤로도 그는 몇 차례 '이 약만 먹으면 살이 빠진다'는 다단계 다이어트식품회사들을 만났다고 했다. 그간 안 먹어본 다이어트식품이 없지만 그는 몸무게를 줄여본 적이 없다며 혀를 찼다.

2003년, 135kg의 몸무게가 됐을 때 그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으로 병원을 찾아갔다. 그전까지는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치료가 필요한 단계라고 인식한 것이다. 병원의 치료를 받으려고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약가 문제가 컸다.

당시 김씨를 치료했던 오상우 교수는 "비만도 다른 중증질환처럼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고가의 약들이 많다"며 "대개의 비만환자들은 고가의 약과 운동치료 등을 병행해야 하는데 사정상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이어 오 교수는 "굶고 운동하면 살이 빠진다는 생각은 금물"이라며 "체계적인 운동치료와 비만관리, 식이요법, 약물치료 등을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시 그는 일산 백병원에서 연구차 실시하는 '싱가포르 비만연구 임상실험'에 동참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상에서 탈락했다. 살을 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그 기회가 좌절되면서 기대도 꺾였다. 그 뒤로는 '그냥' 살았다. 병원에도 가지 않았고, 몸무게는 어느덧 152kg으로 늘어났다.

"한 끼에 공기밥 6개까지 세면서 먹어본 일이 있고. 삼겹살은 1근. 막걸리는 1말 반, 고량주는 19병, 맥주는 3만CC. 한번은 작은어머니와 금식기도 1주일 다녀온 뒤에 산에서 내려오면서 배가 고파 순대국 한 그릇, 설렁탕 한 그릇, 닭 한 마리, 집에서 끓여놓은 죽 한 솥까지 순차적으로 한나절에 먹은 일이 있어요. 그래도 배가 안 불렀으니... 저는 스트레스와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스트레스 받으면 더 먹게 되거든요."

지금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한끼에 밥 200g을 넘기지 않는다고 했다. 비만 때문에 퇴행성 관절염이 왔고, 당뇨도 약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높아져서 '건강관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렇지만 여전히 늘어만 가는 몸무게를 볼 때마다 늘 가슴 한켠이 서늘하다고 했다.

연애에 관한 추억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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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제게 다시 살을 뺄 기회를 준다면 꼭 동참하고 싶어요. 제 소원이 뭔지 아세요? 살을 빼서 삐쩍 말라 죽는 거예요."

김씨는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에게 '연애에 관한 추억'을 물었다.

스물다섯, 한창 예민하던 시기에 '비만의 원인'을 찾기 위해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15주간 누워있으면서 병원에서 들은 얘기는 '내분비계의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속 시원한 답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한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도 그 시절이 아깝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로 결혼은 무산됐다. 그 뒤로는 연애가 잘 안 됐다. 내 몸 추스르기 어려운데 결혼은 무슨, 그런 생각도 했다. 선은 여러 번 봤지만 뜻대로 이뤄진 일은 없었다. 지금도 싱글이다. 그러나 결혼에 큰 뜻을 두지는 않는단다. 인연이 있으면 만나겠지, 한다.

살면서 비만 때문에 불쾌했거나 싫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그는 많다고 했다. 물이 빠져도 둥둥 떠다니는 것을 제외하면 비만이 좋은 건 단 한 개도 없다고 했다.

가장 싫은 건, 남의 시선이라고 했다. 버스나 전철을 타면 뒤통수가 따가운 게 싫다고 했다. 낚시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히치하이킹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태워주면서 그만 태워주지 않을 때도 화가 난다고 했다. 한번은 "저 사람 태우면 내 차 빵꾸 난다"고 해서 친구들이 운전자를 실컷 패준 일화도 있다고 했다.

덩치 큰 것 다 알고 선 보러 나왔으면서도 다방에서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머!" 하고 도망치는 여자가 싫다고 했다. 찜질방에 맞는 옷이 없어 늘 옷을 싸갖고 다녀야 하는 것도 싫다고 했다. 비행기 이코노미 좌석이 너무 비좁은 것도 싫다고 했다.

2006년 파산 끝에 친척의 소개로 경기도 안산의 한 고등학교 경비로 일하며 살게 된 김정봉 씨. 그는 매월 120만원의 급여를 받고 있다. 이 돈으로 노모와 함께 산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다. 살을 빼야겠다는 의지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비만치료를 위한 고가의 약값과 운동치료 비용을 대기 힘들다. 그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살을 빼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양복 한 벌 맞추고 싶어요. 살이 닿으면 천이 금세 헤지거든요. 옷도 실컷 사보고 싶고, 목욕탕도 맘껏 가보고 싶고." 

김정봉 씨의 소박한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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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베이징 올림픽 성화가 타올랐다. 이제 이달 24일까지 모두 16일간 온 국민의 눈과 귀는 중국 베이징 냐오차오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쏠릴 터다. 전 세계 205개국 5천여명의 선수들이 벌이는 지구촌 최대 축제, 올림픽. 여기에 초대 받지 못해 '쓸쓸한 여름'을 보내는 선수들이 있다. 국민 시선에서 한 발 비껴난 비인기종목 선수들, 게다가 올림픽에 출전조차 못한 선수들이다.  

오늘 만날 '무명씨 이야기' 주인공은 한국 여자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가운데 하나다. 이번 올림픽 예선전에서 탈락한 여자축구 국가대표 선수다. 대교캥거루스 소속 차연희(22) 선수. 그는 한국 여자축구 국가대표 최강의 공격수다. 빠른 스피드로 지난 피스퀸컵 때는 멋진 결승골을 넣기도 했다.

한여름의 뙤약볕이 살갗을 태우던 8일 오후 3시 30분, 선수들은 구령에 맞춰 구릿빛 피부를 땀으로 적시고 있었다.

"작년 예선전 때 다 못 뛰고, 최종예선 두 게임만 뛰었는데 많이 아쉬워요. 그래도 올 상반기에는 동아시아대회와 피스퀸컵대회가 있었는데, 올 하반기와 내년에는 계획된 국제대회가 없거든요. 그래도 2~3년 뒤에 벌어질 월드컵과 올림픽 티켓은 꼭 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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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찬 축구선수 아가씨의 결심

다부졌다. 이번엔 베이징 행 티켓을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 내주고 말았지만, 다음 대회 때는 반드시 본선에 진출해 국민적 성원을 받겠다는 각오였다. 이제 갓 약관의 나이를 넘긴 '아가씨'의 다짐이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가 여자축구선수로 받아온 사회적 차별 때문이리라.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상실감이 없다 하면 거짓말이죠. 하하하. 남자축구는 K리그든 국제대회든 뭘 해도 주목받는 반면, 여자축구는 잘 주목받지 못해요. 심지어 여자축구가 있어? 여자가 축구를 해? 이런 분들도 계세요. 남자축구 선수들은 이름을 줄줄 외는 반면, 여자축구 선수들은 잘 몰라요. 같은 축구선수인데... 음... 살짝 서러울 때가 있죠. 후훗."

언론이 띄워주면 '존재감'을 느끼게 되지만, 언론이 외면하면 '없는 듯이' 살게 된다며 웃었다. 차연희 선수는 "열심히 뛰어 남자축구 못지않은 언론의 관심을 받고 내후년에는 실력으로 올림픽과 월드컵 본선티켓을 따겠다"고 했다.

유니폼, 비행기 등 차별이 많다

남자축구에 비해 여자축구는 왜 사회적 주목을 덜 받는 걸까.

"2002년 한일월드컵대회로 축구가 국민적 스포츠가 됐지만, 축구 하면 남자축구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 같아요. 여자축구 역사가 짧은 면도 있긴 하지만, 뭐랄까... 말하기 곤란한데.. 지원이나 뭐 등등 여러모로 많이 부족하죠. 남자축구에 비해."

차연희 선수가 말을 잘 매듭짓지 못하자, 박지호 대교 감독이 나섰다. 대한체육회가 배정하는 예산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난다고 했다. 남자축구의 1/10 수준만 지원받는다고(이 대목에서 여기자인 나는 열불이 났다). 국제대회에서 좋은 결과가 나와야 여자축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하지만, 솔직히 사회적 지원 없이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겠냐며 박 감독은 웃었다. 한국체육중학교 3학년 때부터 본격적인 축구선수 생활을 하게 된 차연희 선수가 '여자축구 선수'로 살며 느낀 '차별'은 어떤 것이 있을까.

"유니폼만 해도 남자선수들은 종류별로 다 지원되지만, 여자선수들은 트레이닝복 한 벌과 유니폼 한 벌이에요. 웃기죠. 후훗. 같은 국가대표여도 남자는 하루 지원금이 10만원이지만, 여자선수는 4만원이에요. 심지어 파주트레이닝센터에서 여자축구 선수들이 훈련하다가도 남자선수들 훈련과 일정이 겹치면 바로 비켜줘야 돼요.
 
어디 다른 지방 훈련장을 알아보고 옮겨다니며 훈련하죠. 국제대회 있을 때 남자축구 선수들은 몸관리 차원에서 전세기를 이용하지만, 여자축구 선수들은 경비 때문에 몇 번씩 비행기를 갈아타요. 진짜 속상했던 기억은…."

바로 2005년 동아시아대회 때였다. 당시 남자축구는 꼴찌를 했고, 여자축구는 우승했는데, 언론은 1면 머릿기사로 대문짝만하게 '남자축구 참패'라 썼지만, 여자축구 우승 소식은 한 면도 싣지 않았다는 것.

"남자축구는 져도 국민적 주목을 받지만, 여자축구는 성적이 좋고 우승을 해도 국민적 관심사에 속하지 못하는구나, 정말 속상했어요. 잊혀지지 않는 잔영이 계속 머릿속에 남는 건 아무래서 섭섭해서 그런 거겠죠?"

중3, 축구를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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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망똘망한 차연희. 이 선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체육에 눈을 떴다. 처음 시작한 종목은 육상. 그러다가 광주체육중학교 3학년 때, 전지훈련을 온 여자축구 국가대표팀의 훈련장면을 목격한 뒤로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워낙 공놀이를 좋아했어요. 해보고 싶었어요. 그때 제가 나름 '허들선수'로 잘나갔기 때문에(하하) 교장선생님, 코치, 감독 선생님 모두 반대하셨어요. 난데없이 무슨 여자축구냐, 성공하지 못할 거다, 그냥 하던 거나 잘해라, 그러셨는데 저는 축구의 매력에 푹 빠졌었죠. 모두 반대할 때 엄마가 밀어주셨어요. 하고싶으면 해! 우리 부모님, 지금도 저의 최고 팬들이에요. 하하하."

명랑소녀처럼 웃는 차연희 선수는 벌써 6년째 축구선수로 뛰고 있다. 그동안 어려움은 많았지만 그만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간혹 결혼한 선배언니들이 힘들어하다 관두는 모습을 볼 때는 같은 여성으로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순탄하게 버티고 있다고, 스스로 위무도 했다.

"스포츠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국민들이 관심을 주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특정한 선수에게 '관심을 몰아주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요. 특히 축구는 팀플레이를 생명으로 하기 때문에, 다 똑같이 힘들게 하거든요. 땀도 똑같이 흘리고. 한 선수에만 집중하지 말아주시길. 골고루 관심을 주세요!"

북한 여자축구선수는 본선에 진출했는데 마음이 어떨까.

"음..당근 응원해아죠. 조예선 1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결승 갈 수 있는 팀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독일에 대항해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 결승까지 간다는 건 누가 우승을 하든 다 비슷한 실력을 갖고 있는 것 아닐까요?"

북한 선수 가운데 맘에 드는 선수는 있을까.

"리금숙 언니요. 대회 나가서 가끔 봐요. 이메일? 에이, 그런 건 못하죠. 하지만 눈이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해요. 북한과 예전과 많이 달라졌대요. 숙소에 놀러와 서로 격려하고 그래요. 저희는 못 올라갔으니까 북한 선수들이라도 선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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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록 선수의 노력하는 모습이 좋다"

그렇다면, 한국 남자축구는?

"하하하하. 에이, 제가 어떻게 평가를 해요? 선전하기를 기원합니다."

짧게 코멘트했다. 차 선수와 같은 공격수, 혹은 남자축구선수 가운데 맘에 드는 선수는?

"음...자꾸 곤란한 질문을... 신영록 선수가 제일 맘에 들어요. 노력하는 모습이 좋아요. 물론 얼굴은 아니지만. ^^ 최고의 장점이라면 저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스피드랄 수 있겠죠. 몸싸움에서 잘 밀리지 않고. 저야 공을 잘 넣지 못하지만, 신 선수는 음... 잘 넣죠."

신세대다웠다. 귀여웠다. 날카로웠다. 그리고 솔직했다. 은퇴하는 순간까지, 저 선수 참 성실했다는 말을 듣고 싶단다. 그것이 축구선수로서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란다. 무진장 소박했다. 그런, 차연희 선수에게 물어보았다.

"저기요, 우리 딸이 네 살이거든요. 얘가 공차는 걸 너무 좋아해요. 뛰는 것도 좋아하고. 축구선수 하고 싶어하는데."

"어으. 절대 시키지 마세요. 슛돌이 이런 거 하면 되겠네요. 해보니까요, 인간적으로 너무 힘들어요. 이건 정말 꼭 당부하는 건대요. 딴 거 시키세요. 여자축구선수 쉽지 않답니다."

우리 두 여자는 경기도 시흥 대교캥거루스 구단 소유 천연잔디구장을 걸어 나오며 엄청 큰 목소리로 시원하게 웃었다. 한여름 더위가 한방에 날아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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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